신앙 칼럼

[2022.10.23] 만일 이생뿐이면

작성일
2022-10-23 13:04
조회
231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만일’이라는 낱말은 가능성이 희박한 내용에 사용할 수도 있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에 사용할 수도 있는 용어입니다. ‘만일, 100년 내에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유성이 지구에 떨어진다면’이라는 말은 가능성이 희박한 가정(假定)입니다. ‘만일, 오늘 안에 지구를 파멸시킬 유성이 떨어진다면’이라는 말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가정입니다. 본문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하였습니다. 여기서의 ‘만일’은 가능성이 없는 경우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첫째,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사람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봅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많은 시간을 예배와 전도와 교회를 위한 봉사에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죽음과 함께 자신의 존재가 소멸되고 만다면 그 예배드린 시간들은 허무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재물을 예배와 전도와 봉사에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재물을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일들을 절제하거나 포기하고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데 사용합니다. 그런데 만일 죽음과 함께 자신의 존재가 소멸되고 만다면 그렇게 재물을 사용한 것이 허무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하여 핍박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죽음과 함께 자신의 존재가 소멸되고 만다면 그토록 핍박을 당하거나 심지어 순교 당한 것이 모두 허무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불신자의 비난과 비웃음이 정당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니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해도 마땅할 것입니다.


둘째,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이라는 말은 내세가 있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내세의 삶이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세 가지 증거로써 답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영원히 살기를 희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처소로 데려가셨고, 엘리야는 죽음이 없는 하늘나라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관한 비유를 통하여 천국과 지옥의 실재에 관하여 매우 생생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음 건너편 세계에 대하여 기록된 성경의 증거들은 다른 모든 증거들보다 확실하고 압도적입니다.

셋째, 만일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한 말씀에는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예배와 전도와 봉사에 더욱 힘쓰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일생은 천국에서의 삶을 위한 준비기간입니다. 농사꾼은 가을의 추수를 기대하고 땀 흘려 수고합니다. 병충해, 가뭄, 태풍이 모든 수고를 헛되게 할 위험이 있을지라도 풍년을 기대하고 농사를 짓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위해 드리고 수고하고 헌신하는 일은 그 무엇으로도 헛되게 하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다만 이생뿐이면” 복음을 혼잡하게 하는 조직이나 행사를 두둔하고 변호하며 그들과 어울리더라도 상관할 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생만이 아니라 내세가 있습니다. 그 곳에서 가장 가련한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천국에서의 삶을 위하여 예배와 전도와 봉사를 큰 즐거움으로 행하는 여러분은 다른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영광스럽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부활의 날과 천국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조용목 목사님 신앙칼럼 ‘푸른 초장 맑은 시내’ 말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