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칼럼

[2023.10.22]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합시다

작성일
2023-10-22 13:56
조회
37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히 12:1,2)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여러 가지 신앙이 있지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의 예수님을 주목하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복된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믿음의 완성을 보게 됩니다.

먼저, 우리가 주목할 예수님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죄와 저주와 질병을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마음을 여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이 임하게 됩니다. 구속의 믿음이 생기고, 천국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둘째,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장차 경험하게 될 부활에 대한 믿음이 그 심령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하여 현실에 당면한 문제들이 무덤같이 무겁고 답답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늙음과 죽음을 지나치게 혐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놀라운 위로와 격려를 얻게 됩니다. 죽어가면서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 스데반에게 주님의 크신 위로와 힘이 임하였습니다. 넷째,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주목하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날을 사모하며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통치에 참여하게 하시는 영광을 생각하게 되고 그날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므로 신령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그 시로부터 믿음의 경주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살펴보겠습니다. 경주에서 낙오하지 않고 최종 목표지점까지 달리려면 무거운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얽매이는 것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첫째, 아집을 내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므로 불편하고 불쾌한 경우들이 생겨납니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자신의 모난 부분이 깨어지고 다듬어질 수 있지만 아집이 강한 사람은 좌충우돌하거나 아니면 대인기피증에 빠지게 됩니다. 아집을 벗어버리는 최선의 방법은 만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하며 교회 중심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집착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지위와 명예와 권세와 재물에 집착하고 연연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믿음의 경주에 무거운 짐이 되고 얽매이는 것이 됩니다. 신앙생활의 전진을 곤란케 하고 장애가 된다면 그것은 내버려야 할 집착에 속합니다.
셋째,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께 맡김으로 벗어버려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고 하신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넷째, 쓰디 쓴 기억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실패한 경험, 억울한 일, 수치를 당한 일들은 이를 예수님께 아뢰고 용서와 치료를 깊이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다섯째, 원망하고 불평하는 버릇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은 광야의 행진을 광야의 방황이 되게 하였습니다.

끝으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인내하며 경주하기 위하여 우리가 마음에 두고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라는 말씀입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뿐 아니라 수많은 죄인들이 구원 얻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믿음의 경주를 한 후에 누리게 될 즐거움을 생각하면서 인내하며 경주해야 합니다.

(조용목 목사님 신앙칼럼 ‘푸른 초장 맑은 시내’ 말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