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칼럼

[2023.03.05] 가벼운 환난과 영원하고 무게 있는 영광

작성일
2023-03-0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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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환난을 가리켜 ‘가벼운 환난’이라고 형용한다면 어색하고 적절치 않게 여겨집니다. 가볍다는 말과 환난이라는 말은 조화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역설적인 말로써 그 가운데 진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 환난이 가벼운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가벼운 환난’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환난이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가벼운 환난’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환난을 당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고통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벼운 환난’이라고 말한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8절과 9절에, 11장 23절에서 27절에 자신이 얼마나 극심한 환난을 당하였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가 당한 환난은 일정 기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활동한 일생이 환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거나, 경솔하게 말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다음으로, “그런데도 어찌하여 바울은 환난을 가벼운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서슴없이 말했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받는 환난’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받는 환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를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성도들은 환난을 가리켜 ‘가벼운 환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께 범한 죄의 중함에 비하면 인간이 겪는 환난은 오히려 가벼운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셨으면 벌써 인간은 멸절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둘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의 중함에 비교하면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가볍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죄를 알지 못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고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죄 많은 인생들로부터 멸시 천대를 당하셨고, 심문을 받으시고 가시관을 쓰셨고 침 뱉음을 당하셨으며, 채찍에 맞으시고 발가벗겨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셋째, 환난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과 인격에 생겨나는 진보와 발전의 중함에 비교하면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가볍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환난을 당하므로 탐욕을 내버리게 되고, 교만을 버리게 되며, 환난 당한 자들을 깊이 이해하고 동정하며 돕게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하며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넷째, 우리가 장차 누릴 영광의 중함에 비교하면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가볍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주의 일에 열심을 다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기 때문에 당하는 손실, 희생, 핍박, 고통은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환난’입니다. 이런 환난은 참으로 놀랍고 영광스러운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크고 영화로운 것인지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 비교하거나 형용할 길이 없습니다. 다섯째, 우리가 장차 누릴 영광의 영원함에 비교하면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가볍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나그네 삶은 잠시 잠깐이지만 천국에서의 삶은 영원한 것입니다.

환난은 진실한 성도를 좌절과 방탕과 절망의 수렁으로 밀어 넣지 못합니다. 극심한 중압감을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당면하는 환난에 대하여 ‘가벼운 환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가진 자답게 담대함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조용목 목사님 신앙칼럼 ‘푸른 초장 맑은 시내’ 말씀 중에서)